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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보 칼럼
2015.04.15 09:06

이슬람과 코란의 역사적 배경

S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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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기독교 개혁신보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으로 모든 권리는 기독교 개혁신보에 있습니다.



  주후 632년 무하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첫 계승자들은 소위 배교의 전쟁을 마치고 바로 기독교 지역을 공격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오마르는 다마스커스, 안디옥, 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다시 4년 후 알렉산드리아까지 정복하였다. 그 후의 역사도 점점 더 로마를 향하여 칼로 목을 조르는 일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정복 전쟁


  그때 무하마드의 계승자들이 왜 그렇게 처음부터 기독교 땅을 점령하려고 했는지는 코란 자체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코란은 하나님과 종말을 믿지 않은 자들과 싸울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싸우도록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지배하도록 하실 것이라(Sura 9:11,14,29,33)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재해석된 신학(cf. Sura 2:29-40, 47ff, 246ff; 3:37ff; 5:10ff 등)에 따라 자신의 신학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도 자유와 사랑, 용서와 설득의 방식이 아닌 복수의 칼로 선교하는 태도가 코란으로부터 기원하였는지는 논쟁점이 될 수 있다. 

  어찌했든 전쟁수칙에 따라(Sura 2:190-194)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목을 가진 그들의 테러는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를 거절하고 그 땅을 부패케 하는 자는 죽게 되거나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고 손과 발이 잘려져 나갈 것이며 그 땅으로부터 추방될 것(Sura 5:33)”이란 표현들 속에서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이 그들의 행동 방침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이다. 

  코란에는 “확실히 믿는 자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 회심자들, 하나님을 믿고 종말을 믿는 어느 누구든 그들의 주로부터 그들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Sura 2: 62, 112; 3:84)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사람이 복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유일한 하나님께 절대 복종이 그들의 최고의 덕목으로 표현되어 있다.

  “믿는 자여 너에게 계시되었다면 너에게 해로운 것들에 대해서 묻지 말라”(Sura 5:101a)고 하였을 때, 적어도 끊임없이 지극히 긍휼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i'llah/a'llah)의 이름으로 용서와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한 말들(Sura 2:271-274)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원인도 있지만 이슬람교 번성의 다른 역사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교 자체의 강한 정복성도 있지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갈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적인 탈을 쓴 것에 못지 않게 근원적으로 기독교 안에 우상화와 형식화로 인하여 자신의 내적인 몰락의 원인이 잠재되어 있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교회적 갈등은 결국 한 쪽의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교와 같은 혼합적 새로운 이단이 그 땅의 정복자로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안디옥의 본성일원론자들에 의해서 칼케톤 신조를 믿는 교회 지도자들의 테러와 350여명의 성직자들의 순교의 피를 흘리는 사건이 있었다. 

  반면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어거스틴주의와 캄파도키아 교부들 및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신학적 체계에 반대하는 대부분 교회들은 이단들이 되어 있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에 이단들에게 적용이 되었던 법(Codex Theodosianus, xvi, 5)의 엄격한 시행들은 동방교회 지역에서 나타난 이단들(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야곱교도, 유티케스파, 본성일원론파, 성부수난파, 의지일원론파 등)에게 오랫동안 직접 적용이 되었던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무하마드는 아라비아 광야나 메디나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로부터 듣고 또한 사막이나 광야 속에 은둔 생활에 들어갔던 동방교회 이단들, 특별히 아라비아의 네스토리우스파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야곱교도인 바히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따라서 코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 부정하고(Sura 4:157)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정하며(Sura 5:16-17; 9:30-31)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였다(Sura 4:171; 112:1-4)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방교회의 단일체제적이고 본성일원론적이며,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이원론 및 기독교 종말론에 기반을 가지되 아브라함 가족 중 이삭보다 이스마엘을 강조하는(Sura 2:125,127) 토속신학을 기록한 책이다. 놀랍게도 그 당시 시리아 교회가 그들의 종말론 사상 앞에 문을 열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무하마드의 영적인 체험들에 대한 의존성도 이단적 그리스도인들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선호성과 잘 비교되고 있다. 

  역시 코란이 형성되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이슬람 종교의 가르침과 생활도 또한 기독교 타락을 비판하는 단순하고 엄격한 종교생활에 집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우상을 타파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합리성(Sura 2:177)과 계층적 동등성을 주장하며 내적으로 다처주의와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제공해 줌으로 하층 세계의 환영과 당시대 교회로부터의 차별성을 이루게 했다는 점도 그 확장의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들도 구약적 예정론을 믿었고 하나님의 속성들에 근거하여 인간의 공로론을 부정하였다. 

  교회가 과거의 교회적 이단 사상들로부터 지금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지금의 우리 교회가 자체 안에 그런 신흥종교를 산출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도 하나님의 진정성이 있고 세계의 역사와 우리의 체험에도 하나님의 진정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유효적 원인들과 결점적 원인들로 있는 이상, 매 계시들에는 그 한계가 있다. 거기에 우주의 모든 신비보다 더 큰 신비가 있다. 

  말씀을 직접 듣거나 말씀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며 통치되는 것 사이에 계시들에 있어서 어떤 우위가 있거나 성경이 주어진 영감과 그것에 의해서 깨닫는 조명이나 자연을 관찰하는 것들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 문제로 교회가 이웃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종교회의나 교회의 판단을 바로 성령의 판단으로 여겨 성경 자체보다 교회를 우위에 두고자 하는 정신이나, 성령은 항상 자신과 일치하시고 만사에 시종 일괄하시며 일단 알리신 그 대로 그 안에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원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추구하는 정신들에 반대해서 오직 성경의 모든 속성들(성경의 절대적 자체 가신성, 충분성, 판명성, 무오성)이 발견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속성들을 포함한 그 무오성은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역사들의 무오성에 근거한다. 그 무오성은 최종적으로 사람들이나 우주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무오성이란 하나님이 증명하시는 것이고 그 만이 증명하실 때 진정한 무오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다가 생명을 잃었다고 해서 그 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원인들이 된 배경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코란에도 표현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그런 일에 울 필요도 없고 놀라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교회 내의 부패가 원인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형벌로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증명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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