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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보 칼럼
2015.03.19 11:30

과학의 세계와 교회의 역할

S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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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기독교 개혁신보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으로 모든 권리는 기독교 개혁신보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 에피쿠루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을 포함해 그 땅의 사람들과 쟁론할 때, 그들 안에 있는 종교의 대상과 종교성 및 신에 대한 그들의 사상들을 언급하고 있다. 


조물주와 동일 시 할 수 없는 피조물


  거기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신적인 것을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행위들이나 하나님의 참된 지식의 결여로 인한 종교행위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해서 알아야 할 중요한 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창조나 섭리의 역사에 있어서 그 역사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듯이 요구하고 계신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경우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의 모든 가르침도 이런 오해에 대한 수정에 불과하다. 여호와라는 성호 자체나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소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항상 주는 자로 계시고 세계나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물들이 받은 방식은 근원적으로 믿음의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 전에 거만하게 지혜를 구하고 기적을 보고자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 현상을 보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전통이나 우주의 근원 원리들에 따라 철학이나 헛된 속임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고(골 2:8) 따라서 그런 것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며 만지지도 말라(골 2:21)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권고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고전 1:20, 21)이라는 이유가 숨어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논리에 따라 캅바도키아의 유명한 세 교부 중 한 사람인 그레고리우스 나찌안제시누스가 “네가 너 자신의 것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의 것을 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너 자신의 것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알겠는가?”라고 반문한 부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우주적 근원원리들에 의한 운명론 혹은 본성의 필연성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모든 필연성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어거스틴주의의 신관과 우주관을 가진 후기 중세 신학자 Buridanus가 힘(impetus)의 개념을 소개함으로 근대 물리학으로 이어가는 역학론을 발전시켰고 그 역학론이 중력의 개념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움직이는 자가 움직이는 것을 움직일 때, 그에게 어떤 던지는 힘(impetus), 즉 움직이는 자가 그것을 움직이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힘을 그것에 인각시킨다. 움직이는 자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움직이는 속도가 크면 클수록, 그에게 인각시킨 던지는 힘도 더 강해진다. 돌을 던진 같은 자가 돌을 던지는 것을 중지한 후, 그 끄는 힘이 그 돌을 움직인다. 그러나 돌에 강요하는 공기의 저항과 무게에 의해서 움직이는 힘이 거기에서 위력을 갖는 그것에 반발하는 의미에서 움직이게 되고, 그 던지는 힘은 점점 약해진다”고 하였다. 

  그 원리에 따라, “어떤 던져진 물체는 그 던지는 힘이 반발의 힘보다 강하게 남아 있는 한 계속 움직인다. 그 던지는 힘이 어떤 반발하는 어떤 것 혹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반발된 운동을 강요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감소되지 않거나 중지되지 않는 한 무한히 계속된다”고 하였다. 

  근대 과학사상에 대한 교회의 이런 공헌과 달리,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대립시켰던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교부들 중에 알렉산드리아 주교 Dionysius가 세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생겼음을 강조한 나머지 자신이 이해한 데모크리투스 학파나 에피쿠루스 학파의 원자론적 우주관, 즉 “그 원자들은 나눌 수 없을 만큼 작은 입자들로서 그 수가 무한하고 무한히 광대한 빈 공간을 전제하고 우연히 그 빈 공간에서 생겨나 주고받으며 불규칙한 힘에 의해서(propter impetus perturbationem) 자동 역학적 방식으로 서로 간에 맞물러 있으며 수많은 형상들에 의해서 서로 얽히게 하여 서로 사이에 결합을 이루고 점진적으로 이 세상을 이루고 그 안에 있는 대상들을 형성하여 더 무한한 세계들을 이룬다”는 세계상을 성경의 가르침과 대립시킨 것은 역사 앞에 큰 실수로 남아 있다. 

  내용적으로는 세계는 일치함이 없이 우연히 된 것이거나 계획 없이 된 것이 아니라는 논박에 그 동기가 있지만, 교회가 언제든지 그런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좋은 예로 남아 있다. 칼빈과 동시대에도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이 알려져 있었고 현대과학의 확률론과 허수 개념을 발견한 제롬 카르다누스(Hieronymus Cardanus)가 살아 있었다. 

  칼빈은 점성학이 아닌 건전하고 참된 천문학은 인간에게 크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를 찬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고 자연과 인간 안에서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술의 탁월함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희귀한 표본,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거울, 그의 영광을 선포하기에 충분하고 분명한 언어를 보도록 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연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 보여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도 진정한 우주론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카르다누스의 허수도 진정한 자연수가 아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자연의 신비 밖에 그리고 성경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 문제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연의 질서와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같은 저자임을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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